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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시스터즈’ 의 행진
 글쓴이 : 우리이웃 | 작성일 : 09-12-28 16:47
조회 : 1,431  
‘거북이 시스터즈’ 의 행진
장애인자립생활 체험홈 ‘우리 이웃’ 김남숙·최명자·우선미
남인희 기자  

“이건 한번도 먹어 본 적 없어.”
서른 세 살에 뿌리에 흙 묻은 시금치를 처음 보았다. 데쳐서 무친 시금치 나물을 보고서야 “아! 먹어봤어” 했다.

▲ 우선미씨
ⓒ 전라도닷컴 사진=김태성 기자

선미씨, 서른 세 살에 시금치를 처음 보다
누워 지낸 시간이 대부분이었던 우선미(34)씨. 집에서든, 20년을 생활한 장애인 시설에서든 중증장애인인 선미씨는 주방 근처에도 가 보지 못했다. 조리가 완료된 음식밖에 보지 못한 선미씨는 그래서 시금치도 쑥갓도 미나리도 몰랐다.

지난해 9월부터 장애인들의 자립생활을 돕는 체험홈 ‘우리 이웃’(광주 북구 오치동 주공아파트)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선미씨. 얼마 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도움으로 전동휠체어까지 갖게 된 선미씨한테는 하루하루가 새롭다. 

좁은 집안이지만 걸치적거린다고 눈치 주는 사람 없고 아무 때나 누구한테도 이르지 않고 외출을 해도 된다. 밥이든 라면이든 콩나물국이든 시래기국이든 내가 선택하는 것, 배고프지 않을 때 먹지 않고 배고플 때 먹는 것, 무슨 옷을 살지 입을지 내가 결정하는 것. 그녀가 원한 것은 그렇게 사소한 자유였다.

남숙씨, 마흔 한 살에 처음 기차를 타다

▲ 김남숙씨
ⓒ 전라도닷컴 사진=김태성 기자

마흔 한 살에 처음으로 여행지를 고르면서 흥분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무안에 갔다. 연꽃이보고싶었다. “그때 기차를 처음 탔어요.”

자신의 존재가 형제들의 결혼에 방해가 될까봐 스물 두 살에 시설로 들어간 김남숙(42)씨.

그때부터 한번도 달라지지 않았던 깡뚱하게 짧은 단발머리는 그녀의 개성이 아니다. 길러 보고도 싶고 파마도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병신 주제에 무슨 멋이냐”고 핀잔을 들을까봐 한번도 머리 모양을 바꾸지 못했다.

아 니, 바꾸고 싶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아니, 단 한번도 어떤 머리를 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아 본 적도 없다. 한번 시설을 방문하면 수십 명의 머리카락을 잘라야 하는 미용 봉사자에게 머리 모양을 이렇게 저렇게 하라느니, 자른 머리 길이나 모양이 맘에 들지 않는다느니 하는 말은 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렇게 잘라 주세요.”
언젠가는 꼭 한번 해 보고 싶던 말이다.
 
명자씨, 마흔 살의 ‘첫 경험’
“누가 백만원을 주면 겁날 거야.”
한번도 안 가져본 그 큰돈처럼,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자신만의 시간이 통째로 생겼다.

아침이 밝아도 “오늘은 뭘 해야지” 하는 생각 따위는 해 볼 수도 없는 생활을 18년 동안 했다. 내일도 모레도 똑같이 그런 날들이 계속되리라는 것, 죽을 때까지 삶의 배경이 이 한 곳뿐이리라는 사실에 절망했다는 최명자(40)씨.

▲ 최명자
ⓒ 전라도닷컴 사진=김태성 기자

어디에서든 줄을 서서 집단으로, 지시하는 대로,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시설에서 ‘나만의 계획’은 무의미했다. 내 삶의 내용을 결정하는 데 내가 소외됐다.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삶은 무기력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날마다 그녀만의 계획을 세운다. 가게에도 가고 동사무소에도 가고 은행에도 가고 때론 시장에도 간다.
마흔이 넘은 나이지만 이즈음 만나는 모든 것이 그녀에겐 ‘첫 경험’이다. 비장애인들의 일상이 그녀에게는 모두 크고 작은 모험이다. 

“힘들어서 행복하다.”
그 벅찬 도전들 속에서 그녀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했다.
 
나 혼자 세상과 맺은 관계 ‘단골’
뇌 병변장애 1급장애인인 세 여자가 둥지를 박차고 나온 이유는 그저 그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 물론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시설에 맡긴 보호자의 역할을 되맡게 될까봐 버겁고, 자립에 실패하고 좌절하게 될까봐 걱정도 컸을 것이다. 그 전이라면 순순히 따랐을 것이다. “부모 눈에 피눈물 나게 하고 가족들에게 상처만 주는 존재”라는 자책감으로 늘 스스로를 주저앉혔던 것처럼.

‘이곳’에서 떠나야겠다고 수없이 결심했지만 ‘저곳’에 발을 들여놓으려니 더럭 겁이 났다. “과연 나 혼자 해 낼 수 있을까…그냥 그만 둘까…미룰까…한 달만 더…하루만 더….” 원하는 삶은 아니었지만 익숙해진 것들과의 결별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어렵게 시설에서 나와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

“이젠 동네가게에 가면 파 같은 양념은 덤으로 준다. 단골이라고.”
파 두어 뿌리에 눈물이 난다. 누군가의 ‘단골’이 됐다는 것. 오롯이 나 혼자 세상과 맺은 관계가 행복해서.

보도턱만큼이나 불편한 차별의 시선들
“사람들은 우리에게 가만히 있지 뭐하러 돌아다니느냐 한다.”
목적지가 병원인 경우라야 차량봉사자들의 도움도 선선히 받을 수 있다.
“정말 장애인은 병원만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세 여자가 한 목소리로 묻는다.
보도턱만큼이나 불편한 차별의 시선들이다. 많은 장애인들에게 스스로를 격리한 채 눈에 띄지 않게 살도록 강요하는 억압의 시선들이다.

이 제 선택은 자유로워졌지만 세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돼 있다.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휠체어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을 갈 수밖에 없도록 강요된 사회에서 그들은 간절히 바란다. 자원봉사자가 원하는 시간이 아니라 장애인이 원할 때 오는 유료 활동보조원을 쓸 수 있는 지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탈 수 있는 저상버스, 제대로 된 경사로를 갖춘 공공시설 그런 것들이 있는 세상을.

장애인의 일상적인 외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비장애인들끼리 만든 세상은 한 발짝도 나가기가 쉽지 않다. 혼자서는 오를 수 없는 그 많은 계단과 보도턱들, 혼자서는 탈 수 없는 버스와 지하철, 혼자서는 들어갈 수 없는 은행과 식당과 그리고 수많은 건물들. 그 완강한 거부의 벽을 향해 세 여자는 지금 천천히 나아가는 중이다.

장애인을 차별하는 세상에서는 잘 눈에 띄지 않는 ‘거북이 시스터즈’를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을 주려고.
사진=김태성 기자

ⓒ 전라도닷컴

“나눗셈이 내 특기”
  자립생활체험 홈 주숙자 소장

“시설에서 잘 살고 있는데 왜 데리고 나와서 고생시키냐.”
지난 2001년 7월3일 문을 연 장애인 자립생활 체험홈 주숙자 소장이 자주 듣는 비난이다.

그러면 그녀가 묻는다. “잘?”
그 ‘잘’에 ‘안전하게’라는 말은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행복하게’와는 다소 거리가 있을 것이다. ‘자유롭게’하고는 더욱 거리가 멀 것이다.

주 소장이 한 복지시설의 교사로 있을 때였다.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시설에서 살아야 하느냐고 한 학생이 묻더라. 평생 그렇게 살다 죽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냐고, 그럴 바엔 차라리 젊어서 죽겠다고.”
그 말이 잊혀지질 않아 이 무모한 일을 시작하자고 결심했을 때 그의 수중엔 19만원이 있었다.

그 돈으로 안내문을 인쇄하고 뿌리고 다녔다.
순 빚으로 17평 아파트 한 채를 얻어 어렵사리 ‘우리 이웃’을 개소하고 나니 주민들의 눈길이 곱지 않았다. 문앞의 스쿠터들을 좀 안 보이는 데 치우라고 할 정도였다 아파트 한가운데로 들어온 장애인들을 비장애인들이 ‘우리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손을 건네고 웃음을 건네고 마음을 건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자신 소아마비 장애인인 주 소장은 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시작하려는 장애인들에게는 든든한 대모다. 친정엄마다.
그간 영구임대아파트를 얻어 분가시킨 장애인만 해도 8명. 

“이젠 분가 세대가 많아져서 나누는 일도 점점 힘들어지게 됐다.”
복지는 나눗셈이라는 그녀. 나누다가 빼먹으면 안 된다. 콩 한 알이라도 누구 서운하지 않게 나누려고 궁리하는 것. 그게 그가 하고 싶은 ‘멋있는’ 일이었다.
“내가 워낙 멋이 들어서 하하.”

 

기사출력  2005-02-20 14:22:19  
ⓒ 전라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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